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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악 유아기를 벗어나 국민학생으로서 사회생활을 배우기 시작하는 나이인 나에게 여순 사건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경험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좌익이나 우익 어느 한편에 가담해야 되고, 그래서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여야 하고 나도 총에 맞아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2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는 여름방학 숙제장을 받았다. (…) 내가 받은 2학년 숙제장 속에는 나로서는 답을 알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공자님이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가다가 어린이들이 흙으로 성을 쌓는 놀이를 하고 있는 장면과 마주치게 되었다. 공자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수레바퀴로 성을 뭉개며 통과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한 어린이가 나서며 공자님을 꾸짖었다. 이 성에는 임금이 살고 있으니 수레에서 내려 성을 피해 걸어가라고 호통치는 것이었다. 공자님은 그 어린이가 시키는 대로 수레에서 내려 성을 피해서 돌아갔다. 이 이야기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쓰라’는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문제의 답을 나는 알 수 없었다. (…) 여름방학이 끝나고 내일이면 개학하게 되는 날, 나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인 사촌형에게 그 문제를 보이고 정답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사촌형 역시 자신 없는 표정으로 ‘아이가 대담합니다’고 답란에 쓰라는 것이었다. 공자님께 호통을 쳤으니 그 아이가 무척 대담한 어린이라는 것이다. ‘대담하다’는 낱말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아이가 대담합니다’는 답이 어쩐지 정답일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은 들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답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숙제장에 그대로 써서 나는 학교에 갔다. 그리고 뜻밖의 사태를 만났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 문제의 답란을 빈칸으로 남겨놓고 등교하여 내 숙제장을 돌려가며 답을 베껴 쓰는 것이었다. 그것도 ‘대담’이라는 말이 초등학교 2학년짜리에게는 뜻을 알 수 없는 어려운 낱말이고 보니 모두 ‘대답’이라고 적는다. 그러니까 ‘아이가 대답합니다’는 답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그 엉터리 답을 써서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우리 인간들의 속성에 관하여 매우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작년의 저 끔찍한 여순 사건에 휩쓸려 죽어간 그 수많은 사람들도 바로 이 아이들처럼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런다고 자신을 설득하며 오답을 정답인 양 착각하고 남들 뒤를 따라가다가 죽음에까지 이르렀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한 깨우침이었다. 나 역시 앞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오답에 휩쓸릴 것인지, 상상만 해도 오싹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자라면서 내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광적으로 독서에 매달렸던 것도 어쩌면 이때의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답을 좇는 어리석은 군중의 하나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일일 것 같았던 것이다.”